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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不定)의 존재들이 침범한 공간

장유진

   누군가 혹은 어떤 대상과 특정한 형태의 관계를 형성할 때 우리는 그것과의 친연성을 발견하고자 무던히 애쓴다. 대상과의 유사성을 바탕으로 형성된 관계는 우호성을 전제하는 듯하지만, 영원히 지속하지 못하고 어느 순간 끊어지기도 한다. 그 기저에는 관계로서 얽힌 존재들이 유사성의 기준이 되는 존재와 그것으로 재단되는 존재로 양분된다는 사실이 자리한다. ‘닮는다’라는 동사는 그 앞에 ‘무언가를’이라는 목적어를 요구한다. 따라서 그 무언가를 기준으로 닮음이 정의된다. 이 경우 관계 속 존재들의 경계는 절대적이거나 확고한 것이 아니며, 그 기준에 따라 언제든지 바뀔 준비가 되어있다. 즉 관계 맺음은, 그 정도에 차이는 있을 수 있어도, 관련성을 바탕으로 하며 그것의 척도는 지극히 주관적이기에 관계 속에서 발생한 경계는 필연적으로 가변적이다. 

 

   경계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인간 존재가 맺는 다양한 양상의 관계에 적용한다면,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적 구분에서 탈피할 수 있다. 예컨대 소크라테스를 소급하여 자랑스레 내세우던 빛나는 이성을 바탕으로 한 주체로서의 인간 중심적 사고는 흐려지는 경계와 더불어 빛바랜 지도의 한 조각에 지나지 않게 된 것이다. 비로소 인간, 비인간뿐 아니라 생명, 비생명, 그리고 이들을 총칭하는 중심, 주변의 구분으로 영토화한 지난날의 지도와는 사뭇 다른 지도를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지도 속의 존재들은 명확하게 정의되는 단일한 고리로 연결된 대신 상황과 맥락에 따라, 관점과 입장에 따라 무수한 고리를 형성하고 그것을 해체하고 다시금 서로를 연결하며 횡단의 지도와 종단의 등고선을 그려간다. 

 

   작가 이지민은 이러한 관계의 특성을 고려하여, 새로운 지도 위 존재들이 경계 없는 관계를 마음껏 맺고 끊는 과정에 주목한다. 페트리 접시에 흰색, 붉은색, 검은색의 실리콘을 주입하고 경화 시켜 세포의 분열 과정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를 얻은 <종>(2021)은, 존재 간 경계의 취약함을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경화되기 전 세 가지 색상의 실리콘은 유동적인 액체의 상태로 서로의 공간을 침범하며 실리콘 존재들 간의 경계를 뒤섞는다. 이러한 작업을 진행한 작가 본인조차도 실리콘 간의 관계를 발견할 수도, 정의할 수도 없다는 점에서 세 가지 색 실리콘의 관계뿐 아니라 실리콘과 인간의 관계 또한 재고하게 한다. 인간은 그의 수행성으로 행위를 할 따름이며, 접시 위 실리콘은 각자의 물질적 특성을 충실히 반영하는 나름의 수행성을 견지한다. 이는 모든 존재-기계가 인간에 의해 다만 수동적으로 활용되는 대신, 한편으로는 능동적으로 인간을 변화시킬 수도 있음을 주장하는 레비 브라이언트(Levi R. Bryant)의 매체 생태론과 일면 닿아있다.¹ 접시 위의 실리콘은 주체인 인간에 의해 그 형태가 정의되는 개체에 불과한 것이 아니며 독립적인 존재로 자신의 위치를 점유한다. 오히려 인간이 경화된 후의 실리콘을 보고 액체 상태의 실리콘을 보며 예측했던 바와 다른 형상을 지각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브라이언트가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의 예시를 빌려 인간이 기계를 설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계 또한 인간을 설계하여 서로를 변화시킨다고 설명한 기계에 대한 논의로 이 지점을 해석할 수 있다.²

 

   세 점의 디지털 프린트 작업인 <Sabina>(2021), <Julia>(2021), <Юлия>(2021)는 강렬한 붉은색을 특징으로 신체의 일부를 확대해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나 한껏 동물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이들 작업은 맨드레이크를 모티프로 하여 토란, 연근, 생강 등의 식물을 이용한 연작 <미등록 신품종>(2018)을 확장하여 제작한 것이다. 과학은 생명 존재들을 크게 동물과 식물로 나누어 이해하는데, 이 디지털 프린트 작업은 이러한 ‘객관적인’ 지표를 무너트리고 동물과 식물의 구분에 대한 인식론적 혼란을 초래한다. 이때 동물과 식물의 이분법적인 경계는 시각적으로나마 흐려지며 양립할 수 없었던 각 존재들의 거리감이 좁혀진다. 토란, 연근, 생강 등의 식물들은 그 생태적인 특성으로 말미암아 위계를 형성하는 수직성을 탈피한다. 이들은 뿌리 식물로서 수직으로 자라는 수목과는 달리 수평으로 뻗어 나가며, 중심과 주변의 구분이나 주체와 객체 따위를 상정하지 않은 채 다만 다양체로서 존재하는 리좀(Rhyzome)으로 설명된다.³ 이러한 식물들을 활용하여 표현하고자 한 모티프인 맨드레이크는, 뿌리 식물들이 동물과 식물의 경계를 해체하며 제3의 어떤 것으로 보여진 것과 유사하게, 식물도 인간도 아닌 중간의 그 무엇으로 불릴 수 있는 존재이다. 이로써 세 프린트는 동식물 이미지의 결합이자 혼동으로 설명되어 작업의 시작점에 있는 피사체의 근원적인 특성과 그를 대하는 관객의 인지 작용을 아우르는 다층적인 경계의 재설정을 시도한다. 

 

   바나나에 꽂은 향이 태워지는 모습을 촬영한 영상 작업 <바나나에 향 꽂기>(2020)는 점점 짧아지는 향의 모습을 후작업 없이 그대로 보여준다. 영상에는 거부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에 유난히 취약한, 빠르게 변화하는 존재들인 껍질이 까진 바나나와 불붙은 향만이 출연한다. 영상 속 두 존재들은 현실과 똑같은 속도로 갈변하고 산화하지만, 현실과는 다른 시간에 놓여 그 과정을 무한히 반복한다. 이들은 역설적이게도 영상의 끝에서 다시금 발아하는 것이다. 비생명체인 향은 생명체의 근원적인 특징인 생성과 소멸의 단계를 겪고 생명체인 바나나는 소멸 이후 새로운 생명을 얻으며 자연적인 생명체로서 명명되기를 거부한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영상이라는 매체이다. 영상은 과거의 어느 한 시점을 현재로 가져오고 그 시점이자 순간들의 집합에 영속성을 부여한다. 영원한 시간에 갇힌 향과 바나나는 생명체도 비생명체도 아닌 존재로서 새롭게 정의되기를 요구하지만, 영상의 시간성은 과거, 현재, 미래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여 이들을 정의할 수 없게 한다. 인도에서부터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작가의 손에서부터 아이폰을 통해 전시장으로 이동한 향은 제각기 다른 시점에 영상 앞에 선 관객에게 자신을 발산한다. 이것은 매 순간 다른 향기와 다른 지속성으로 설명되어 개별 관객들과 상이한 관계를 맺고 어느새 그 관계를 끊고 표류하기도 한다.  

 

   정의할 수 없는 존재들이 서로와 뒤엉키며 그려낸 지도는 단순히 유사한 존재들 간의 관계를 발견할 수 있는 흔적 그 이상이다. 물론 그 지도의 한 횡단 축에서는 존재들 간의 관련성을 바탕으로 한 관계도 포착된다. 그러나 어느 한 종단 축을 그리는 등고선에서는 같은 존재들이 다르게 정의되며 이전의 경계를 허물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생명체는 지도-등고선에서 그저 한 축만을 점유할 뿐이며 인간은 그 속에서도 지극히 일부 위에 놓여있다. 작가 이지민의 존재들은 수평과 수직의 축들 사이를 활개 치며 그 촘촘한 공간을 직조한다. 어떠한 명확한 경계도 없는 그 공간 속의 존재들은 서로와 관계되는 동시에 전혀 관계되지 않기도 하며 그저 역설적인 위치를 차지할 따름이다. 그리고 그 속의 인간은 끊임없이 표류하며 무한한 얽힘을 관망하는 존재에 불과하다.

¹ 레비 브라이언트는 ‘기계’가 모든 존재의 성질이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조작된다는 것을 잘 드러낼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존재를 칭할 때 ‘기계’라는 용어를 활용한다.

² 레비 브라이언트, 『존재의 지도(기계와 매체의 존재론)』, 김효진 (갈무리, 2020), p. 43

³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천 개의 고원』, 김재인 (새물결, 2001), p.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