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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들이 결합하는 투명한 공간

이영현

   인간 중심으로 세워둔 존재들의 위계란 현시대에 우리가 위치한 사회를 바라보는 데 있어 빈약하고 제한적이다. 존재의 다양성을 고려하지 않고 인간 외의 영역들을 통제하려는 시각은 단일한 틀 안에 우리를 붙잡아둘 뿐이다. 오히려 우리가 인간 신체에 갇혀 있기 때문에 생태계에 공허한 기준만을 고정시켜온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은 새로운 관점을 끌어들인다. 이를테면 새와 곤충의 눈은 인간의 눈보다 더 많은 색상을 인식하며 인간이 보지 못하는 자외선까지 볼 수 있다. 지구에서 가장 오랜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곰벌레는 지구를 벗어난 우주에서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실험 대상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인간존재보다 오랜 시간 지구 위에 뿌리 내리고 있는 나무들의 생명력은 또 어떤가. 인간에 비해 크기가 작은 생명체들이 가진 존재감과 그 수행성을 인간보다 못하다고 보는 것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이 개체들의 시야에 담기는 더 많은 스펙트럼의 색상이나 보다 긴 시간성을 인간은 기술 장비 없이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도, 쉽게 접근해볼 수도 없다. 그러나 이들이 가진 시선과 언어는 항상 우리 주변에서 부유하며 같은 객체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하나의 세계 안에서 인간이 바라볼 수 없는 관점으로 살아가는 개체들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여 얼마나 광활한 이야기들을 들려줄 수 있을까. 그들의 존재를 인간과 같은 생명체로 인식할 수 있다면 우리가 인간 존재를 바라보는 시선 또한 달라질 것이다.

   존재들을 바라보는 기존의 일방적인 방식을 벗어나, 조각가 전경선은 따뜻하고 섬세한 나무 조각으로 인간과 비인간 존재들 사이의 관계성을 새롭게 부각한다. 그의 작품들이 가진 ‘서사적인 조각’이라는 공통적인 특징은 작가만의 고유한 내면을 드러내며 작품에 담긴 메시지에 공감하게 만든다. 본래 서사 자체는 인간의 역사와 분리시킬 수 없는 요소로, 사회를 통제하고 규칙화함으로써 우리 삶을 영위하는 방향으로 기능해왔다. 인간에 의해 기억되고 서술되어 말로 전해져온 모든 서사는 인간의 탄생과 생존 모두에 기여한다. 개인의 경험을 서사화하는 인간의 본능은 의미의 세계를 구성하는 행위로 이어진다. 인간존재는 경험한 기억을 이야기하는 일에서 벗어날 수 없고, 전경선의 작품 역시 그러한 서사 표현의 연장선이다.¹ 작가의 감성적인 나무 조각들은 흐트러진 사회를 바로잡는 서사성을 가지는 동시에 인간 내면의 욕구를 해소시켜주는 몽환적인 무의식의 공간을 드러낸다는 양면성을 가진다. 작품 속의 서사는 행위가 먼저 일어나고 인식이 뒤에 일어나는, 무의식에 충실한 흐름을 가지고 있다. 의식적으로 나열되는 대신 인간의 기억과 경험을 토대로 자유롭게 결합되는 공존의 서사가 그 중심이다.

 

   전경선의 작품들이 그려내는 투명한 공간은 무의식이 구체화된 채로 현실과 결합되어 있다. 이 곳에서 인간은 가장 솔직하고 순수한 내면으로 파고들어 자신의 원초적인 본능과 마주한다. 통제되어 있던 내면의 욕구는 작가만의 서사적 공간을 만나 비로소 해소되고 치유 받게 된다. 자연과 함께 성장해온 작가의 기억을 바탕에 둔 이 공간 안에서 인간은 개체들과 결합되고 개체들은 인간 신체로 내재화되는데, 이로써 우리는 다른 존재들과 우리가 똑같이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는 자연의 일부임을 맞닥뜨린다. 비인간 영역으로 구분되곤 하는 존재들은 더 이상 마냥 부차적으로 인간이 세운 경계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존재와 같은 세계 안에서 복잡하게 얽혀 다변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작품의 재료가 나무라는 점 역시 인간사회와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자연과의 관계성을 강조하며 전반적으로 따뜻한 감성을 더한다. 작업 과정에서 1차적으로 완성되는 섬세한 연필 드로잉과 이후 나무 조각으로 구현되는 결과물은 작품마다 남아 관계를 맺는다. 이러한 이중작업이 가진 감성적인 서사와 유연한 곡선의 표현까지도 작품들의 상호연결성을 드러내 주는 듯하다.

 

   작가의 이상적이고 현실도피적인 작품세계는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의 작품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초현실주의 정신을 자신의 작품으로 전개시킨 달리는 섬세하고 정교한 표현으로 환상적인 세계를 현실처럼 표현해낸 화가이다. 그의 작품세계 안에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독특하게 결합된 이미지가 주를 이룬다.² 앞서 언급했듯이 달리의 작품들처럼 전경선의 이상세계도 초현실적인 흐름으로 무의식이 그려내는 서사를 따르고 있다. 존재들 간의 관계에 주목하는 전경선의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2009)를 보면 흘러내리는 듯한 곡선적인 인물 표현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달리의 녹아내리는 비현실적인 사물 표현을 떠올리게 만든다. 마찬가지로 <가을의 기억>(2012)에서도 표현된 서로 이질적인 존재들과 인간 신체의 결합 역시 초현실주의 작품들과 유사하다는 인상을 준다. 작가는 두 작품에서 인간상을 표현할 때 사실적인 재현을 택하는 대신 동식물이나 사물과 결합된 모습으로 하나의 자연을 이루고 있다. 자칫하면 기괴할 수도 있었을 이 조합이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녹아들어 관객의 내면에도 스며들 수 있는 것은 작가의 투명한 내면적 성향들이 작품으로 구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동일한 서사의 작품 <공존>(2016)에서 가장 먼저 시선을 끄는 것은 두 개의 커다란 인간 형상이다. 이들은 중앙에 정체를 가늠할 수 없는 추상적인 형상을 두고 양쪽으로 눕혀져 배치되어 있는데, 한 형상의 흉부에 뚫린 구멍과 그 반대편 형상의 돌출된 흉부가 꼭 두 형상의 접합부 같이 보인다. 분리된 것으로 보이는 두 인간상이 원래는 하나로 결합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중앙의 곡선으로 뒤엉킨 형상은 붉은 색상이나 형태 때문에 핏줄이나 인간의 내부 신체 기관을 연상시킨다. 결국 작품이 내포하는 바는 남녀를 상징하는 두 인간상의 결합과 중앙에 복잡하게 엉켜 있는 존재들 간의 연결성이다. 존재하는 모든 객체들은 하나로 얽혀 있고, 가장 순수한 공간 안에서 자연의 일부로서 만나 화합할 수 있다. 작가가 그려내는 새로운 존재의 지형도 역시 모든 객체들이 조화로운 하나로 결합되어 원형의 지구를 구성하는 모습일 것이다. 인간존재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으로 여겨졌던 비인간 존재들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영역 안에서도 인간존재와 깊게 뒤엉켜 관계 맺고 있다. 인간을 포함한 존재들은 하나의 세계 안에서 살고 있지만, 동시에 또 다른 각자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그 안에서 그들은 스스로의 내면을 탐색하다가도 서로의 영역이 교차됨에 따라 끊임없이 짙은 영향을 퍼뜨리게 된다. 전경선의 작품 속에 내포된 함의를 인지하고 스스로 공감하게 될 때,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와 존재들을 재인식할 수 있는 새로운 장이 열릴 것이다.

¹ 박정흠, 「현대조각에 있어서 흔적과 서사의 Fractal 조형연구 - 연구자의 작품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8), p. 19

² 한진화,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의 작품연구」, 『단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4), p. i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