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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피의 실험실: 다리의 배양, 관찰, 기록

권홍은

   신이피는 스스로의 작업을 실험실로, 작가 본인을 실험실의 주인 혹은 관찰자로 상정한다. 작가는 전지적인 위치에서 자신의 관찰 실험대에 개체들을 올려놓고 각종 작용을 가하는데, 관찰자로서의 전능한 시각은 규범, 젠더, 위계 등 외부적인 요인에서 탈각된 채 대상을 향한다. 그래서 작가의 ‘실험실’은 흔히 통용되는 사회과학적 발견의 물리적 장소이라기보다는 진공의 상태에서 여러 층위의 변인 작용과 관찰이 이루어지는 장이다. 작가는 인간 개개인, 그 사이의 관계성, 과학적 명제, 그것이 분류한 비인간 개체들을 그들이 놓여진 익숙한 환경에서 아예 분리시켜 새로운 시선으로 관찰하고 뜯어본다. 

   작가는 집단 속 개인의 내러티브, 그리고 그들 간의 관계성을 미시적으로 시각화하는 시도를 해왔다. 2016년 스페이스나인에서 진행된 작가의 개인전 《관찰실험실: 인체풍경》에서는 작가가 관계 맺은 사람들에 대해 물리적인 시각화를 시도했으며, 관람자는 영상이나 실험기구, 그래프, 유리 슬레이트 등의 도구를 통해 그들을 들여다보게 된다. 각각의 작품에는 어떠한 사전 정보도 없이 실험 도구를 활용해 피실험체를 샬레에 가둬놓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관람자는 작가가 설정해놓은 프레임 너머로 피실험체를 살피는데 그들 또한 관찰 대상으로 작가에게 포착되어 관찰실험실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가 된다.¹ 그런가 하면 2018년 송은아트큐브에서 선보인 《희연한 잠》에서는 개별성을 띠는 내러티브와 미시적인 관계성을 다룰 뿐 아니라 죽음이라는 맥락 속에서 신체를 다각도로 사유함으로써 점차 인간으로서의 지위가 소멸되어 가는 개인의 양상을 살핀 바 있다.²  

 

   신이피는 자신만의 실험대에 올려두고 관찰하는 대상으로 내러티브를 가진 개개인이라는 하나의 세포를 넘어 사회를 구성하는 또 다른 세포들, 그리고 그것들이 모여 이루는 유기물의 전체로 점차 확장해 나간다. 존재하는 개체들을 인간과 비인간이라는 이분법으로 흔히 구별 짓는 경향에서부터 나타나듯, 이성 중심의 과학은 각각의 대상들이 가지는 개별성을 무시한 채 거시적인 시각에서 그들을 파헤치고 판단한다. 한편, 과학적 명제는 ‘객관적으로 참’이라는 슬로건을 앞세워 의심 없이 믿게 하고 감히 반박할 수 없는 우월성을 획득해왔다. 이 절대적인 권위는 가끔 종교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과학이 주도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여타 개체들은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정돈된 규범에 폭력적으로 편입되고 말았다. 신이피는 2019년 SeMA 창고에서 열린 《다리의 감정》 과 2020년 온수공간의 《죽은 산의 냉철한 새》전시를 통해 특정한 속성이나 집단 속에 무차별적으로 묶여버린 것들에게 각각의 내러티브를 부여하는 실험을 선보였다. 

 

   이번 전시에 등장하는 영상 작업 <다리의 감정>(2018)에는 프랑크푸르트에 위치한 젠켄베르크 자연사 박물관을 주요 매개로 여러 단편적인 이야기들이 교차되어 있다.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큰 자연사 박물관 중 하나인 이곳에는 실제 공룡 화석 뿐 아니라 방대한 양의 동식물 박제, 표본들이 전시되어 있다. 진귀한 금은보화나 기계장치들을 수집하고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권위와 재력을 암시하는 용도로 구축된 귀족들의 컬렉션 공간인 ‘캐비닛 오브 큐리오시티(cabinet of curiosity)’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는 박물관은 자연물, 상품, 심지어 같은 인간종에 대한 모순적인 욕망에서 기인했다. 이후 근대에 접어들면서 박물관은 서구 열강들의 과학적 연구라는 명목 하에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고, 이를 작동시키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자 동력은 선별과 분류다. 개체들을 나누는 기준이 합리적인 과학을 숭상하는 인간의 편의성에 의해 일방적으로 확립되었음은 자명하다. 작가는 폭력적인 방법론으로 분류된 개체들을 입맛대로 박제하고 전시하는 박물관 시스템 속에서 인간을 중심으로 개편된 권력 구조를 발견하고 이를 <다리의 감정> 속 여러 내러티브 중 하나로 풀어냈다.

 

   영상에 빈번히 등장하는 핀에 꽂혀 박제된 벌은 자연사 박물관의 질서에 편입되지 못한 종이다. 이 벌들은 과학계와 박물관이 정립해놓은 벌의 조건-꿀을 생산하고 채식을 할 것-을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벌’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벌이 아닌 것도 아닌 아이러니에 맞닥뜨린다.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나름의 진화적 대응이었으나, 공고한 생물학의 체계가 그것을 수용하지 않은 결과다. 작가의 2018년 전시 《다리의 감정》 에 설치된 <부정한 지연>(2019)에서 역시 다리가 잘린 채 박제된 사슴은 박물관의 시스템에 부합하지 않아 유리관 안에 담겨 전시되지는 못한다. 개체에 대한 존중이 무너지고 그들을 대하는 태도가 무차별해진 곳,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의 산물로서의 박물관을 은유적으로 제시해 내재된 권력을 재고하게 만드는 <다리의 감정>은 체코의 테레진 수용소를 또다른 내러티브로 교차시킨다. 수용소 뒤편의 호화로운 독일군 주둔지를 수용소 내부로 둔갑시켜 ‘휴양지와 다를바 없는 쾌적한 시설의 수용소’로 전세계에 선전된 이곳은 사실 아우슈비츠로 이송되는 과정 중에 놓인 중간 수용소였으며 유대인 수만명이 처참히 학살된 비극의 장이었다. 신이피는 그 경중의 다름은 인정하면서도, 인종 뿐만 아니라 때에 따라 정치적, 종교적 성향이라는 분류법을 내세워 고문과 학살이 정당화된 역사적 비극과 사회・과학적으로 합의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행해지는 박물관의 자의적인 선별을 동일한 선상에 두어 생명권에 대한 고민을 상징화했다.

 

   다리의 존재는 쉽게 인지되지 않는다. 수뇌의 신호를 전달받아 움직임을 뱉는 수동적인 말단 기관일 뿐인 다리. 온전한 몸에서 잘려나가는 순간 우리는 그것이 실존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잃어버리고, 잊어버리는 때가 되어서야 인식되는 다리는 하나의 완결된 몸이라는 전체, 더미, 집단에서 그 존재가치를 부정당한다. 그러나 핀에 꽂혀 박제 당한 벌의 몸뚱이에서 여전히 진동하는 것이라고는 다리 뿐이다. 물리적인 죽음으로 중심부의 작용이 정지되었으나, 다리는 무언가를 알아차려 달라는 아우성을 내지르는 것처럼 떨림을 멈추지 않는다. 천오백명의 유골을 매장한 에거 강 동쪽의 돌 하나에도 다리는 존재한다. 추모된 희생자 개개인 모두가 여전히 진동하고, 감각하고, 표현하는 다리를 가진 것처럼.

   신이피의 되짚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더욱이 정해진 답을 내리지도 않는다. 변화하는 환경은 무조건적으로 수용되어야할까. 달라진 사회에서 변이된 종은 어떤 이름을 달고 어디에 위치할 수 있을까. 조건과 분류라는 거대한 권력 속에 개체들은 어떻게 개별성을 보장받을 수 있을까. 혹은 어떤 더미로 간주될까. 격리된 죽음 앞에서 개체는 개별일 수 있을까. 작가는 전능하고 무감각한 관점을 유지하며 과학적이고 역사적인, 그리고 삶의 모든 순간과 맞닿은 근원적인 질문들을 얽어나간다. 

 

   신이피는 영상에 담긴 작가의 고민과 사유를 관람자에게 직접적으로 드러내보이지 않는다. 어떤 기억을 떠올리거나 미래의 무언가를 상상할 때, 그 순간이 구체적이지 않지만 선명한 시각 감각과 선형적인 시간을 초월한 비언어적인 이미지의 흐름으로 느껴진다고 말하는 작가는 멈추지 않는 이상 계속 해서 흘러가는 이미지를 구현하기 위한 가장 적확한 매체로 영상을 꼽는다. <다리의 감정>에서 역시 선명하지만 서로 유기적이지 않은 이미지들이 흘러가듯 병치하고, 화면 가운데 등장하는 텍스트는 이미지를 설명하는 자막으로서 기능하지 않는다. 앞뒤가 맞지 않아 분절된 시 같은 텍스트들은 일관적인 서사를 이루지 않고 어느 한 부분을 잘라내도 이야기의 뉘앙스, 느낌을 낼 수 있도록 얼기설기 삽입되어 있을 뿐이다. 영상 속 교차된 내러티브를 이루는, 작가가 오랜 시간에 걸쳐 리서치한 내용들은 직관적으로 감지되기 어렵다. 영상을 보는 관람자는 주어진 이미지로 시각적인 분위기를 읽을 뿐, 객관적인 무언가를 얻어가지는 못한다. 다큐멘터리에서 다룰 법한 소재들을 사용하고 있지만, 작가는 키워드만 던져줄 뿐 대상의 실체에 대한 더 깊은 사유는 보는 이들에게 맡기고 있다. 실험실의 주인이자 관찰자인 가상의 화자는 매끈한 연구결과를 공표하는 대신, 자신의 실험실 안으로 관람자를 직접 끌어들여 현미경을 쥐어준다. 위계와 권력, 환경과 적응, 분류와 경계,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며 끊임없이 진동하는 신이피의 실험실 속 관람자, 우리, 그리고 그것들로 환원될 수 없는 개별의 ‘나’ 역시 그 떨림을 함께 한다. 

¹ 최승우, '관계라는 이름의 별자리를 그리다', https://neolook.com/archives/20160410g (2021년 5월 20일 검색).

² 김성우, '관계의 절연과 갱신', http://www.songeunartspace.org/programs/user/cube/cube_ex_p_ex1.asp?num=250http://www.songeunartspace.org/programs/user/cube/cube_ex_p_ex1.asp?num=250 (2021년 5월 23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