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kaoTalk_20210621_161944415_edited_edited.png

‘eiπ + 1 = 0’

차지원

“됐습니다. 그게, 이성이야 어떻든 상관없습니다.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영역인 것 같군요. 하지만 방문은요? 어쨌든, 방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죠?”

“피크닉을 한번 떠올려 보시지요.…

피크닉 말입니다. 숲, 시골길, 풀밭을 떠올려 봐요. 차가 시골길에서 풀밭으로 들어가고, 차에서 젊은이들이 내리고 술병들, 음식이 담긴 바구니들, 아가씨들, 트레지스터라디오, 카메라들이 나옵니다…… 장작불이 타오르고 텐트가 세워지고 음악이 흐르지요. 그러다 아침이 되면 이들은 떠납니다. 밤새 공포에 떨며 벌어지는 일을 지켜보던 동물과 새, 벌레들이 자기 피난처에서 기어 나옵니다. 그때 이들이 보게 되는 건 뭐겠습니까?

…(중략)…

그러니까, 불피운 흔적이며 사과 찌꺼기, 사탕 껍질, 통조림 캔, 빈 병, 누군가의 손수건, 누군가의 주머니칼, 오래되어 찢어진 신문, 동전들, 다른 들판에서 온 시든 꽃 같은 것들을……”

“압니다. 노변의 피크닉이죠.”

“바로 그겁니다. 우주의 노변에서 열린 피크닉.” (『노변의 피크닉』, p.230~231)¹

 

   외계인이 피크닉한 지구 곳곳에는 그들이 버린 쓰레기가 남겨져 있다.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소설 『노변의 피크닉』에서는 금지 구역에 들어가 외계인이 놓고 가버린 쓰레기를 몰래 팔아넘기는 ‘잠입자(Stalker)’가 등장한다. 절대적인 타자의 낯선 방문과 그들이 남기고 간 물건들은 그 장소를 찾아간 사람들에게 그동안 지켜온 가치체계와 신념에 물음표를 제시하고, 자기 자신의 내면을 대면케 한다. 이처럼 낯선 것과의 공존과 조우는 우리에게 예기치 못한 사건 혹은 변화를 경험하게 한다.

 

   차혜림 작가는 우리의 이성이 닿을 수 없는 어떤 세계의 그림자에 대해 지속적으로 탐구해왔다. 이 그림자는 인간의 눈에는 포착되지 않는 개별자들의 운동일 수도 있고, 평면적으로 치부될 수 없는 존재의 깊이일 수도 있다. 지도상을 떠도는 미분자들은 각각의 세계에서 정당하고 나름대로 의미 있는 행위를 수행하고 있는 존재들이다. 따라서 차혜림 작가가 제시하고 있는 전시 공간은 개별 존재들이 공존을 시도하고 있는, 비현실적이고 부조리한 공간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차혜림 작가의 작품 속에는 이처럼 개별 개체들이 모호한 다중의 관계를 만들며 평등하게 나열되어 있다. 이들의 운동은 선형적인 내러티브를 구성하지 않으며, 그들만의 단서를 따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열린 구조를 지닌다. 원초적으로 생각해본다면, 애초에 작품에 등장하는 오브제 간의 구체적인 연관 관계를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오히려 연결성을 찾기 어려운 파편적인 이미지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부조리극처럼, 비선형적인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는 개별자들은 비실재적인 환상영역을 만들며 현실을 해체하고 전복시킨다. 차혜림 작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작업 속에서 개별자들의 의미를 재창조하며, 새로운 의사소통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해체된 현실의 시공간 위로 균열을 가한 작가는 그 균열 위에 잠재되어 있는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사고의 변위를 일으킨다. 따라서 새롭게 조립되어진 관계와 의사소통 안에서 새롭게 호명된 사물과 이미지, 이야기들은 새로운 상호연결성과 상호작용성을 갖는다.

   우리는 늘 끊임없이 안으로 침잠하는 자유로운 ‘밤’을 그리워 해왔다. 그것은 가능성의 영역, 응축되고 압축된 세계, 규정되어 있지 않은 것, 닿을 수 없는 거리, 결핍과 과잉의 과정들이 기준점에 도달하지 않는 거리, 닫힌 상황에서의 탈출,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것들이 쌓이는 공간일 수 있다. 이러한 공간으로서 명명된 ‘밤’은 적어도 작가에게는 회복과 소생의 순간이며 창작을 촉발하는 리듬을 일으킨다.

   밤의 현장에서 작동되는 특수한 매커니즘들은 번역의 단계를 통과하여 일종의 악기로 재탄생된다. 차혜림 작가는 작업 과정에서 파생되는 것들, 패턴과 방식들, 움직임, 장치들을 연주하는 악보를 만들고자 한다. 접합과 동시에 공명을 기대하며 대기하고 있는 일종의 부품들은 소리를 만들어내는 장치로서 치환된다.

   어둠 이후 낯선 자들의 공연이 끝난 자리에는 일시적으로 머물며 남겨진 것들, 수거물들, 잔해들이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다. 그곳에는 고장난 악기도 있고, 인간을 빌어 스스로 작동하는 악기도 있다. 그들이 내는 소수의 소리들, 특수한 개별자들의 소리는 한 공간에 모여 합주를 시작한다. 이제 음악을 조합하는 것은 관람자들의 몫이다. 관람자들은 공간 안에 놓여진 오브제들을 자율적으로 구성하는 방식으로 전시 공간을 스티칭(stitching)해 나간다.

   차혜림 작가에게 전시 공간이란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어딘가의 텅 빈 공간이다. 따라서 작가의 설치는 현장마다 다르며, 가득 찰 수도 있는 동시에 관람자의 주관적 요소로 채울 수 있는 빈 공간이기도 하다. 작가는 방문객들의 상상력이 텅 빈 공간과 만날 때 공간의 가능성이 넓어진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차혜림 작가는 특정 공간이 가질 수 있는 분위기와, 우리가 공유하는 공공 영역이 개인으로서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고민하며, 예술작품과 그것이 존재하는 공간 사이의 역학 관계에 관심을 가진다.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노변의 피크닉』에서 등장하는 낯선 타자를 관람자에 대응시켜 본다면, ‘eiπ + 1 = 0’이라는 수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끝도 없이 계속되는 무리수인 e, 무한히 뻗어 나가는 π, 상상의 수이자 허수인 i 라는 서로 연관이 없는 것들에 1을 더하면 무의 세계인 0이 된다는 수식이다. 차혜림 작가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이 숫자들 사이의 연결 관계에 주목하고, 여기서 ‘+1’을 관람객과 같다고 생각했다. 전시 내에서 관람객은 공간에 들어가서 호흡하고 상상하며 무한의 세계를 만드는 자가 되며, 0은 아무것도 없는 무의 개념이 아닌 계속해서 펼쳐나갈 수 있는 가능성의 영역, 압축되고 응축된 세계를 나타낸다고 작가는 설명한다.

   차혜림 작가의 전시가 흥미로운 이유는 이처럼 작가가 작품을 만드는 데 집중하기보다 ‘전시’를 구성하는 데 집중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단락지을 수 없는 개별자들을 모아 열린 구조의 방식으로 엮어낸 후, 이접과 분절, 접합과 횡단을 통하여 전시 공간을 또 다른 방식으로 전환한다. 작가는 관람자가 느슨하게 봉합한 이 균열된 시공간 위를 관람하는 여행자가 되기를 바라며 작품을 만들고 설치한다. 즉, 작가는 작업 전반에 걸쳐 이루어지는 일련의 과정들을 일종의 악보로 재구성하며, 여기서 작가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지휘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작가가 제시하는 새로운 공간에는 다양한 개별자들의 이야기 조각이 존재한다. 그것은 관람자들의 열린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관람자는 작가가 던져놓은 수수께끼 같은 단서를 따라가며 작가가 제시하는 태도와 방법론, 그것이 내포하는 의미를 더듬어 본다. 작가가 제시하는 오브제는 ‘개별자’임과 동시에 외계인과 같은 ‘낯선자’의 역할을 하며 관람자에게 섬뜩한 조우를 경험하게 한다. 하지만 이내 관람자는 그 과정이 바로 작가가 포착한 존재들임과 동시에 그들 간의 복잡한 관계성임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¹아르카디 스트루가츠키, 보리스 스트루가츠키, 『노변의 피크닉』 (1972)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sf 소설로, 외계인의 방문에 의해 해몬트라는 가상의 도시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현상을 다루었다. 소설의 주인공인 레드릭 슈하트는 구역에 들어가 돈이 될만한 아티팩트를 훔쳐 파는 스토커이며, 외계인이 방문한 후 8년에 걸쳐 슈하트를 비롯한 스토커들의 하위문화를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된다. 『노변의 피크닉』은 이후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에 의해 영화 <잠입자>(1979)로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