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kaoTalk_20210621_161944415_edited_edited.png

지도 그리기 - 인식 그리고 재현의 윤리

1.

   미술계에 마치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신유물론(New Materialism)은, 전시와 저술들을 통해 그 논의의 밀도가 포화되기에 이르렀다. 이제 우리는 예술이 자신이 다루는 윤리적 주제를 실천적으로 수행하고 있는지 질문을 건넬 필요가 있다. 나는 예술이 여전히 재현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믿는데, 그 재현의 대상은 언어이기도 하고 빛의 시각장 그 자체이기도 하다. (전자는 상상계-상징계로 한데 묶인 인간의 언어 세계일 것이며, 후자는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 혹은 영화의 키노 아이(Kino Eye)일 것이다.) 그러나 때로 예술은 실재의 재현을 꾀하기도 하는데, 여기서 실재(혹은 실재계)란 인간의 언어 바깥이자 조건인 부재 원인을 통칭한다. 같이 실 굳이 거슬러 올라가 보자면 실재를 재현하고자 하는 요구는 고딕(Gothic), 바로크(baroque)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보다 더 현대적 취향에 가까운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의 낭만주의 회화 또한 동일한 계보에 놓인다. 그러나 주지하듯 이러한 요구들은 전적으로 의식의 확장, 다시 말해 의식의 초월을 염두한 시도였으며 이들이 재현하고자 한 의식의 초월은 유럽의 백인 남성의 비대한 나르시즘을 확장하는 편협한 윤리일 뿐이었다. 이러한 시도들은 지극히 관념론적인 관심에서 출발했지만 나는 이들의 예술이 도달하고자한 숭고, 그리고 그 불가능성의 역사가 오늘날의 예술이 재현하는 ‘존재의 측정’에도 지속된다고 말하고자 한다. 변화한 점은, 다시금 떠오른 과학주의와 총체화라는 에피스테메(episteme)가 윤리의 방향을 인식의 내부에서 외부로 전향했다는 것이다. 고딕과 바로크, 낭만주의와 같은 위의 사례들은 인식의 숭고라는 전근대적 물자체(das ding)로의 지향이었지만 정작 그것이 재현된 매체는 회화라는 이성과 감성의 의식 세계였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신유물론을 자신의 사조로 삼는 예술들은 그 윤리의 관심을 인간적 인식의 초과에서 과학적 세계로 돌렸지만 비언어적인 것(실재)은 언제나 관측을 거쳐 언어로 재현된다. 카렌 바라드(Karen Barad)가 양자역학을 경유하여 주장하듯, 측정은 언제나 관측자-관측기기-관측대상을 하나의 얽힘 뭉치로 만든다.¹ 관측자가 설정한 환경 그리고 관측 기기는 관측 대상과 별개로 존재할 수 없으며 관측과 동시에 이들은 얽힘의 장으로 진입한다. 결국 관측 결과에서 관측 대상은 관측기기와 관측자와의 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예술이 실재적 대상을 재현하려고 하는 행위 또한 그러하다. 인간의 인식 바깥에 있는 재현 대상(관측 대상)을 예술 매체(관측기기)라는 욕망의 인식틀 안에서 재현(관측)하는 것이다. 예술에는 대상이 재현되기까지의 작가 혹은 관측자가 가지는 욕망의 경로가 명확하게 표시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재현이 과연 ‘윤리적인가?’ 여전히 인간중심적 욕망으로 주조된 실재의 재현은 앞서 언급한 윤리적 성취의 불가능성을 말하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는 오로지 이러한 윤리적 욕망의 서사에 드러나는 증상만으로 실재를 알아챌 수밖에 없을까? 무수히 쏟아진 이 아포리아들의 질문에 적절한 답변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질문들이 파고드는 지점에 천착해야 한다. 말하자면, 증상으로서의 실재를 가능하게 하는 예술의 서사적 징후들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거쳐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 서사를 가능케 하는 부재 원인 뿐이다.

 

2.

   사건이 출발하는 지점 A와 도착하고 있는 지점 B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객체들이 위치한다. 각 객체들은 모두 “중력”(gravity)들이다.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의 이 중력 개념은, 존재의 실재성을 추적할 수 있는 유용한 장치이다. 사건을 구성하는 객체의 존재는 각 객체들의 수행성에 의해 드러난다. 양자역학에서 설명하듯, 사건의 시공간이 내재면(plane of immanance)에서 진행될 때에, 중력은 직진하는 시공간을 비틀고 왜곡하며 가장자리로 우회한다. 사건의 시공간에 주름(fold)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것은 객체 중력들이 단순히 사건의 인과나 필연적 요소로 작용한다는 것이 아니다. 물질과 객체는 무작위적이며, 우연적으로 튀어나온다. 존재지리학적 지도그리기는 물리적 엔트로피가 아닌 카오스적 토폴로지를 따른다. 우리가 사건을 고려할때, 더 나아가 우리 자신에 대해 고민해야 할 때도 우리는 우리가 속한 내재면의 내부작용 (intra-activ)들을 살펴야 한다. 객체로서의 우리는 항상 또다른 수행 관계와 얽혀 있기 때문이다. 들뢰즈와 가타리(Pierre-Félix Guattari)가 제시한 개념 “리좀”(Rhizome)이 이 국지적 얽힘들을 설명할 수 있는 일반적이면서 전통적인 개념일 것이다. 식물의 가지가 흙으로 뻗으면 뿌리가 되듯, 객체들은 중력을 가지고 공전하며 자신과 얽힌 다른 객체들을 변화시키고 스스로가 변화한다는 것이다. 이 객체와 객체, 물질과 물질, 사건과 사건과의 횡단성을 살펴야 한다. “평평한 존재론”(Flat Ontology)은 신화일 뿐이다. 객체들은 복잡하고 무작위적으로 뒤얽히며 권력과 힘의 관계를 도출한다. 사건에 대한 철학적 분석은, 이러한 객체, 힘, 중력 등의 권력적 다이어그램을 그리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이 전시 또한 단순히 여러 객체 요소들을 인간 주변에 늘어놓고 평평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 보다, 작가들이 포착하는 혹은 드러내는 개체들을 복잡한 등고선과 힘의 다이어그램으로 제시할 수 있기를 바란다.

윤태균

¹ Karen Barad, “PostHumanist Performativity: Toward an Understanding of How Matter comes to Matter”, Signs, Vol. 28, No.3,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Gender and Science: new Issues(Spring 2003), pp. 801-82.